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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6년 7월 16일 황엄이 불상을 가지고 오면서 끼친 민폐. 전라감사가 사직을 청하다
명나라 사신 황엄 등이 나주에서 불상을 들고 왔다. 불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황엄은 관사를 새로 짓는다던가, 지나는 곳마다 물자를 요구한다던가 하였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질하기 일수였다. 전라도 관찰사 박은이 황엄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를 태종에게 일러바쳤고 박은은 스스로 사직하길 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처음에 황 태감(黃太監) 등이 서울로 떠나매, 경기(京畿)·충청(忠淸) 두도의 감사(監司)가 영접할 때 크게 나례(儺禮)를 갖추고, 기악(妓樂)과 유밀과상(油蜜果床)이 지극히 번화해도 폐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황 태감(黃太監) 등이 만드는 부처를 운반할 자재와 기구가 매우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에게 해(害)가 되는데, 이를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꽃함[花函] 10여 구(具)를 만들어 잡꽃을 심어 가지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할 때, 신은 곧 황 태감을 보고 말하기를 ‘내 감사(監司)로서 왕지(王旨)를 받들지 아니하고 감히 이 함(函)들을 실어 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황공(黃公)이 대답하기를, ‘세 부처 앞에 3구(具)씩 놓아 가지고 돌아가려 하니, 그대는 속히 전하께 계문(啓聞)해서 만들도록 하고, 혹시라도 지체하여 나의 노여움을 사지 마시오.’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신은 즉시 도당(都堂)에 보고하였는데, 도당에서는 신으로 하여금 잘 핑계하여 실어 보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국가의 대체(大體)를 중히 생각하여 끝까지 금하지 못하고, 승도(僧徒)들로 하여금 그 꽃함을 운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죄의 넷째입니다.
심지어 황엄은 정승이 마중을 나오기를 원했는데 그러지 않자 화를 냈고, 이후 태평관에 이르러 불상에 대한 예를 하고자 할때 태종이 절을 하기 원했다. 황제가 불상을 구했으니 당연히 예불해야한다는 논리였다.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태종은 끝까지 절을 하지 않았고, 황엄과 따로 궁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아마 개인적으로 만나 오해를 풀고 달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태종이 환궁했는데도 황엄이 오지 않자, 좋은 말을 보내니 겨우 창덕궁에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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