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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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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최초의 효녀 진원군(珍原郡) 백성의 딸 도리장(都里莊)이 그 부친이 성 쌓는 역사에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아무 형제도 없으니 내가 가서 보아야 혹시나 살아 돌아오실 것이다." 하고, 남복(男服)으로 바꿔 입고, 즉일로 길을 떠나 길가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꼭 들어가서 보았다. 판교원에 이르러 그 부친을 보게 되었는데, 병이 위태하므로 마음껏 구료해서 부축하고 돌아오니, 고향에서 효녀라고 칭찬했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리게 되어 도리장에게 면포(綿布)를 내려 주었다. 태조 5년 3월 4일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효녀가 바로 도리장이다. 도리장은 외동딸이었다. 아버지가 성을 쌓으러 갔다고 했으니 일반 백성이었을 것이다.전에도 언급했듯이 이 시기 축조..
세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세자가 서연(書筵)에서 강(講)을 마치자, 여러 강관(講官)이 모두 나갔는데, 우보덕(右輔德) 함부림(咸傅霖)이 나와서 말하였다. "들은 바가 있사온데 고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세자가 대답하였다. "할 말은 다 하시오." 함부림이 말하였다. "창기(娼妓)가 궁중에 출입한다는데 참말이옵니까?" 세자가 무안한 얼굴로,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소." 하였다.』태조 5년(1396) 1월 24일 세자였던 이방석은 태조의 7번째 아들이었다.수많은 왕자들을 뚫고 태조의 간택으로 세자가 되었다.태조의 사심이 가득했던 세자책봉이었다. 하필 7번째 아들이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나머지 왕자들이 불만이 많았다.또힌 장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정통성이 어긋나있던 상황이었다.이방석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불만을..
스님, 힘 좀 쓰셔야 겠네요 태조실록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궁궐 축조 관련한 기록이다.아무래도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수도를 옮기면서 대량의 축조가 필요했다.궁궐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일반 백성들이 주 타깃이었다. 그러나 동원만으로 부족해 남아도는 인력을 이용한다.한 때 지위가 막강했지만 고려 멸망 이후 꿰어진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린중, 스님을 궁궐 축조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명하여 서소문(西小門)을 고쳐 짓도록 하고, 석장(石匠)인 중[僧]의 머리를 베어 그 위에 매달아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태조 3년(1394) 2월 15일 궁궐을 짓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응당 책임자를 처벌한다.그러나 유독 스님에게는 혹독하게 대했다.처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려버렸다. 『중추원 ..
외교 전문 해결사 『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태조3년(1394) 6월 1일 정안군은 훗날 태종이다.명나라에 왕자가 가는 것은 모험이었는데, 볼모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가게 되는 건 아마 최후의 보루이지 않았을까.명나라와..
명나라 황제의 까다로운 입맛 맞추기 『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서 와서 의탁한 여진(女眞)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嚴峻)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碩輔)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이직(李稷)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말씀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 ..
조선이라 불리게 되다 한국과 중국은 이전부터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 도 사신은 꾸준히 왕래를 하고 있었고,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였다. 아직은 국호가 없던 시절 명과의 외교관계를 살펴보자.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그림 태조 1년 07월 17일 태조 즉위 07월 18일 관료들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자고 청함 (새로이 나라를 세웠으니 명나라의 인정이 필요했다.) 08월 29일 명나라에 조임이 사신으로 감 ‘태조가 즉위하게 된 사유를 알리는 표문’을 가져감 (아직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를 권지고려국사로 칭했다.) 10월 25일 명나라에 정도전이 사신으로 감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표문’을 가져감 (명나라 황제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었다.) 11월 27일 조임이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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