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hapter1/태조실록

명나라 황제의 까다로운 입맛 맞추기

728x90






『임금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이성(泥城)·강계(江界) 등지에서 와서 의탁한 여진(女眞)의 인물을 찾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황제는 군사가 많고 정형(政刑)이 엄준(嚴峻)하였으므로 마침내 천하를 차지했지만, 사람을 죽임이 정도에 지나쳤으므로 원훈(元勳)과 석보(碩輔)들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이에 우리 작은 나라를 자주 책망하면서, 강제로 청구함이 한량이 없었다. 지금 또 나에게 죄가 아닌 것을 책망하면서, 나에게 군대를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니,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공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이직(李稷)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또한 말씀을 낮추어 조심스럽게 섬길 뿐이다."

 

하였다. 명하여 시중(侍中)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등과 더불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할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태조 2년(1393) 5월 25일



 

명나라 황제가 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잘 나타난다.


이에 대한 태조의 대응도 볼만하다.


아마 태조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하라는 대로 한다.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지 않는 것처럼.

 

6월 1일 남재를 사신으로 보내 황제가 힐문한 조목에 대해 답변을 한다.


요약을 하면 이렇다.




Q. 절강성의 동쪽과 서쪽의 백성들이 조선에 소식을 전한다고 하던데?’

A. 원래부터 서로 보고한 일이 없었습니다.

 

Q. 요동에 행례할 때, 사실 뇌물주고 꾀려고 한 거 아니냐?

A. 사신이 왕래하면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꾀려고 했겠습니까.

 

Q. ‘여진인 5백여 명을 몰래 데리고 간다고 하던데?

A. 이전부터 조선에 살던 사람들이 일부 도망가서 살고 있어서 체포했습니다. 원하시면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Q. 조공품 중 말의 품질이 모두 나쁘더라.

A. 사실 원래 조선의 말이 좋지 않습니다.

 

Q.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라고 사신을 보냈는데 왜 답이 없느냐

A.

『삼가 이것은 왕요(王瑤)가 스스로 흔단(釁端)을 만들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의 한 짓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그를 집에 물러가 있게 하여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되, 처자(妻子)와 한 곳에서 그전처럼 단란하게 살고, 조석의 봉양(奉養)도 평상시와 같게 하였는데, 왕요가 비록 지극히 혼암(昏暗)하지마는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곧 성은(聖恩)이 미치는 바이므로 신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실록에 기록된 그대로 올리겠다.


왜 국호를 조선이라고 안 쓰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공양왕 탓을 하고 있다.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표문을 보낸 지 한 달 뒤 갑작스런 소식이 들려오는데,


7월 28일 명나라에서 조선사신을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8월 2일 입국허가 표문을 보내면서 여진인 400명을 명나라로 보냈다.


논란이 되는 여진인을 얼른 보내며 입국을 요구한 것이다.


8월 15일 드디어 그 이유가 밝혀진다.




『사은사(謝恩使) 이염(李恬)이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왔다. 이염이 들어가서 황제를 뵈오니, 황제가 그의 꿇어앉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책망하고, 또 머리를 숙이게 하고 이염을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게 되었었는데, 약을 마시고 살게 되었다. 그가 돌아와 요동(遼東)에 이르니, 역마(驛馬)를 주지 않으므로 걸어서 왔다. 황제가 요동(遼東)에 명령하였다.

 

"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아아... 정도전 그는 도대체... (궁금하다면 클릭)


원인은 바로 이염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힐문에 대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신에게 성질을 부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엔 사신이 뜻 모를 죽음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8월 29일 요동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예부에 자문을 보냈다.


여진인을 보낸 것과 동일한 방법이었지만 명나라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자문은커녕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9월 2일 남재가 돌아오면서 3년에 한번 조회하라는 황제의 지시를 가져온다.


명나라는 오히려 강력하게 조선을 압박했다.


조공관계에 따른 각종 승인을 3년에 한번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명나라를 가고자하는 사신들은 모조리 거부당했다.


9월 17일 진표사 이지


9월 29일 천추사 박영충


10월 27일 사은사 이직


12월 7일 하정사 경의

 

모두 입국에 실패했다.

 

상황이 안좋게 흘러가자 1394년 2월 19일 태조가 직접 주문을 올린다.


남재가 올렸던 대답에 추가 질문을 더했다. 겹치는 내용은 생략한다.

 



Q. 왜구로 변장해서 노략질하는 자를 잡았는데 고려출신에 고려왕이 배를 줬다던데?

A.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 자를 넘겨주시면 심문을 하겠습니다.

 

Q.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라고 사신을 보냈는데 왜 답이 없느냐?(2)

A.『국왕(國王)의 명작(名爵)을 내리지 않았다고 여겨, 감히 함부로 왕(王)이라 일컫지 못한 것이며, 실로 업신여기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시행하고 있습니다.

 

Q. 국호 변경 허가를 해줬는데 소식이 없고, 행례에 권지국사라 쓰질 않나, 한 달 후에야 표문이 올라오네?

A. 국호 허가에 대한 사신이 행례 사신보다 늦게 가서 그렇습니다.

 

Q. 창왕, 공양왕이 우리에게 내조한다했을 때 너희가 허가를 하지 않았다. 공양왕 아들은 내조했지만 바로 돌려보냈는데 너희는 고려를 뒤집고 나라를 세웠네? 이들이 내조하려한 것은 우리가 정벌할까 두려워 신용을 얻으려고 한 거 아니냐?

A. 그들이 부도덕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싫어하여 내쫓았고 저를 추대했던 것입니다.

 

Q. 표전에 왜 업신여기는 언사를 섞느냐?

A. 제가 표전을 제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태조는 명나라와의 얼어붙은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성스레 주문을 적었다.


그러나 황제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명나라 황제가 답을 할까?


이번에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챙겨준 것이라 거절은 안 될 것이다.


과연 무사히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반응형

'chapter1 > 태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님, 힘 좀 쓰셔야 겠네요  (0) 2018.10.01
외교 전문 해결사  (0) 2018.09.27
조선이라 불리게 되다  (2) 2018.09.15
왕씨 모반사건  (4) 2018.09.11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2) 2018.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