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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종실록

동북면 조사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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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년 11월 5일 이날 태조가 동북면에 있는 선릉을 참배하러 간다고 했었다. 신하들이 말려도 즉위 후 한 번도 선릉에 참배를 하지 못했다며 의지를 꺾지 않던 상황이었다.

 

억지로라도 가고자 했던 그곳에서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이방석의 어머니이자 태종의 배다른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고자 했던 것이다. 태종은 태조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와 친했던 사람들을 보낸다. 그리고 군사와 장군들을 동북면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사의는 안변에서 몰래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다. 김옥겸이 그 소식을 전하려다가 잡혔는데 산을 겨우겨우 기어서 탈출했다. 정보전달이 늦었다면 태종이 대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천우가 조사의에게 포위를 당해 겨우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등 밀리는 형세가 나왔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의의 난은 의외로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강 주위에 주둔하던 조사의의 군사들은 태종의 병력이 지속적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 두려워하던 중 군사 한명이 도망치기 위해 밤에 불을 질렀다. 마침 강이 얼어있던 상황,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강의 얼음이 깨졌고 수백여 명이 죽었다고 한다. 동북면에서의 난은 자멸로 끝이 났다.  

 

태종 2년 11월 27일 난이 진압되고 다음날 태조가 회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조는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 아들이 사람을 안 보냈지? 역시 날 싫어하는 가봐’라며 여전히 태종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태조는 약 2주 후인 12월 8일에야 서울에 돌아갔다.

 

조사의의 난,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태조가 동북면으로 가자마자 뒤따라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다는 점, 태조를 호위하던 신하들이 조사의의 난에 참여했다는 점, 태조가 여전히 그리워하는 이방석과 신의왕후 강 씨의 복수를 내세운 점 등을 볼 때 태조도 이 사건에서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인 것 같다.

 

20일 남짓 지속되었던 동북면의 난으로 안변이 대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사의를 비롯한 주동자들도 목이 베였다. 신하들은 죄의 경중을 논하였지만 난의 여파는 없었다. 그러나 태조와 태종의 마음속 깊이 갈라진 무언가를 매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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