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2년 9월 28일 연왕이 황제가 되어 조서를 보냈다는 통사 강방우의 전언
명나라에서 새 황제가 등극한 뒤 첫 사신으로 유사길, 왕태, 온전, 양영 등이 조선에 왔다. 한 달 정도 조선에 머무르면서 금강산에 놀러가기도 하고, 태종의 사냥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물론 환대 잔치를 제일 많이 했지만 말이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의 패시브, 잔치 자리에서의 자리다툼이 이번에도 발생한다. 온전은 왕태보다 직책은 높으나 왕태가 조명을 들고 왔기 때문에 상석에 앉았다. 이에 마음이 상한 온전은 병을 핑계로 잔치에 나오지 않았는데 태종이 두 번이나 부르니 겨우 참석하기도 했다.
유사길과 왕태가 문묘에 배알 할 때 참석을 했었는데 제향 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누가 주제 하는지도 물어봤다. 그 외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조선에 여러모로 흥미를 가지는 사신들이었다.
"관자(官資)는 몇 등급이 있습니까?"
"전선(銓選)과 봉증(封贈)을 본조(本曹)에서 주장합니까?"
"전선(銓選)은 어떻게 합니까?"
"봉증(封贈)은 어떻게 합니까?"
"외관(外官)은 몇 등급입니까?"
"관(官)은 얼마입니까?"
"그 관원을 어떻게 차견(差遣)합니까?"
"백성을 해(害)하여 함부로 거두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공역(工役)과 재부(財賦)를 본조(本曹)에서 맡습니까?"
"1경(頃)의 부(賦)는 얼마나 됩니까?"
"1결(結)에 부과하는 것이 얼마입니까?"
"군(軍)과 민(民)이 다름이 있습니까?"
사신들은 매우 세세한 것 까지 물어보는데 진짜 궁금해서 그런 건지, 황제가 조선에 대해 정탐하고 와라 한 건지는 모를 일이다.
며칠 뒤 권근이 유사길에게 시를 지어주었는데, 유사길이 말하기를
"지난날에 육옹(陸顒)의 무리들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시(詩)와 술[酒]로써 황락(荒樂)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선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웃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처음부터 시(詩)를 짓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대의 시를 속운(續韻)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라 하였으니 육옹의 공(?)이 꽤나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육옹이 사신들에게는 이정표 같은 느낌이었으려나.
한 번은 사신들이 비 오는 날 잔치에 참석하려고 하니 곧 개이기도 했다. 태종은 사신들을 한 껏 추켜세운다.
"지금 성천자(聖天子)가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고, 네 관인(官人)이 왔으므로, 삼가 작은 술자리를 준비하여 한 잔을 내고자 한 것인데, 아마도 황천(皇天)이 나의 정성에 감동한 것인가 보오."
이 말은 적어도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태종은 사신들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신이 돌아간다고 하면 며칠만 더 머무르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11월 7일에 돌아가기로 했던 사신은 태종의 부탁으로 3일을 더 머문 뒤 10일에 돌아간다. 돌아가는 날에도 태종은 사신들에게 술을 권하였는데 사신들이 싫다는데도 계속 권해서 결국은 술을 먹인다.
태종은 사신들을 육옹이 왔을 때처럼 거의 한 달을 조선에 머물게 했다. 태종이 사신에게 잘 보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위해서인 듯한데,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태종은 왕자 시절 명나라 황제를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연왕이었던 새 황제, 태종은 그와 나름의 친분이 있었으니 친근감을 표출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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