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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년 4월 19일 좌정승 김사형이 각사를 이끌고 원자 책봉을 하례하였으나 받지 않다
"원자(元子)란 맏아들이란 칭호(稱號)라, 반드시 봉(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경문(經文)에 상고하더라도 원자의 책봉이란 말은 반드시 없을 것이다. 전일에는 자세하게 상고할 겨를이 없이 이 일을 행하였지만 또 뒤따라서 하례(賀禮)함은 잘못이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왕(王)은 비록 작으나 원자(元子)이십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고(告)해준 말이다. 어찌 원자를 봉했다 하여 칭하(稱賀)하겠는가? 경전(經傳)에 ‘자(子)’자를 ‘생(生)’자와 같이 썼다. 전(傳)에 말하기를,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 천자(天子)에게 맹세한 뒤에야 세자(世子)가 된다.’고 하였으니, 만약 세자를 봉했다면 나라의 근본을 정한 것이라, 진하(陳賀)함이 옳다."
하루 전날 원자를 책봉했던 태종은 신하들이 책봉 축하식을 열려고 하는 것을 반대한다. 태종의 말을 들어보면 아예 원자 책봉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경전에도 원자를 책봉하는 내용이 없다며 전날 원자 책봉한 것이 이미 잘못이라고 한다. 신하들은 경전에 없는 것은 맞지만, 이미 원자 책봉을 했으니 하례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원자의 나이는 9살, 내년이면 학궁에서 공부할 시기였다.
태종 2년 5월 6일 터를 정한 지 7개월이 지나 원자의 학궁을 완성시켰다. 특별히 원자의 교육을 위해 경승부를 설치하고 사재 직장(司宰直長) 1명, 혜제고 영(惠濟庫令) 1명, 수창궁 사정(壽昌宮司正) 1명, 수녕궁 주부(壽寧宮注簿) 1명, 소윤(少尹) 1명, 승(丞) 2명, 주부(注簿) 2명을 두었다. 즉 원자 교육을 위해 9명의 신하를 붙인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태종이 신경을 많이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태종 3년 4월 8일 원자가 입학하였다. 태종은 명나라 황제에게 부탁해 원자의 서책을 받기도 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었다. 본격적으로 원자가 공부한지 5개월, 성과는 있었을까?
태종 3년 9월 22일 원자가 왕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자 왕이 탄식하다
"내 나이 거의 40이 되어 귀밑털이 희뜩희뜩하나, 조석(朝夕)으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읽으니, 네가 그 뜻을 아는가?"
하였다. 원자가 임금의 뜻을 알지 못하니, 임금이 탄식하며 김과(金科)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딱하다. 저 아이여! 내가 말하여도 캄캄히 알지 못하니, 슬프다! 언제나 이치를 알 것인가?“
10살이 뭘 알겠는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재들은 보통 이 시기부터 빛을 발한다. 원자가 본인만큼 재능이 있기를 바랐던 태종이었다. 참고로 원자의 이름은 제(禔), 그 유명한 양녕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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