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년 간 골치아픈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였다. 그중에서도 골칫덩이였던 사신 육옹의 한마디에 졸지에 1만필의 말을 바쳐야했던 사건이 있었다.
태종 1년 2월 6일 정종 때 갔었던 성절사에 대한 답방으로 육옹과 임사영이 사신으로 왔다. 태종은 그들을 환대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 씩 잔치를 벌였다. 육옹은 기분이 좋았는지 시를 잔뜩 지었고, 심지어 기생도 한명 꼬셨다. 한 달 동안 조선에서 잘 놀고 가는 사신들이었다.
태종 1년 6월 12일 사은사에 대한 답방으로 장근과 단목예가 사신으로 왔다. 몇 주 전 태종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기뻐하는 꿈을 꿔서 아리송했었는데 사신이 고명과 인장을 들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역시나 잔치를 열었는데 여악이 들어오자 사신들이 즐거워하지 않았다. 육옹의 이야기에는 여악의 언급이 없는데 어찌된 것일까? 장근과 단목예는 16일에 돌아갈 때 까지 시만을 주고받았을 뿐 많은 것을 탐내지 않았다. 청렴 결백하고 예절을 잃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다.
사실 명나라로 돌아간 육옹은 황제가 ‘조선이 원나라에게 여악으로 사신을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러냐’라는 물음에 지금은 없다고 했다.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좋은 말을 구매해 국방력에 보태자고 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바로 착수하도록 했다. 그래서 육옹과 축맹헌이 조선에 말을 사러 간다. 중간에 장근과 단목예를 만나는데, 장근이 육옹에게 왜 여악이 없다고 말했냐고 물어본다. 거짓말이 황제에게 발각되면 끝장이기 때문에 이후 육옹은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태종 1년 9월 1일 축맹헌과 육옹이 사신으로 왔다. 말 1만 필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에서는 말 5천 필 정도만 준비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4천 필을 올려 보냈을 때 말값이 예상보다 비싸서 추가비용이 필요했다.
축맹헌은 말값은 많이 줬는데 말의 수가 적다는 말을 하며 걱정했다. 사실 이직과 윤곤이 명나라에서 말값을 미리 정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 땐 것이다. 사신이 이 내용이 적힌 문서가 있다고 하자 그제서야 깜빡했다고 했다. 윤곤은 바로 잡아들이고 이직은 휴가 중이었기 때문에 서울로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이틀 뒤 모두 유배를 갔다.
이처럼 명나라와의 말 무역 과정에서 조선의 준비는 아마추어적이었다. 술에 취해 무역마의 장부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자가 있었고, 허약한 말을 따로 관리하는 데에 그 수를 총 관리자가 몰랐으며, 말값을 고르게 나누지 않은 자도 있었다.
육옹은 조선에 오고 난 후 줄곧 장근이 황제에게 고발할까 두려워 태종에게 살려달라고 한다.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피폐해져서 후임으로 단목지가 사신으로 오게 된다. 단목지는 단목예의 동생이었지만 평판은 달랐다. 날마다 기생을 끼고 시를 쓰며 놀았고, 축맹헌이 말값을 치르기 위해 다시 조선에 왔을 때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총 7천여 필의 무역마를 보냈다. 말을 더 보내야 했으나 명나라 병부에서 무역마 1만 필을 억지로 채울 필요 없다는 자문을 보내왔다. 더 이상 말무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태종과 축맹헌, 단목지 모두 기뻐했다. 얼마 전까지도 말무역이 지체되자 사신들이 불평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었다. 6개월 간 양국에게 피해만 입혔던 무역마 사건이 드디어 종결된 것이었다.
이후 명나라는 무역마 2천 1백 93필을 추가로 주문했고, 조선은 2천 1백 41필을 보낸다. 남은 52필은 면제했다. 결과적으로 무역마 1만 필을 채우지 못했던 것인데,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지 않았나 싶다.
성절사 :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
여악 : 여자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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