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년 2월 6일 중국의 사신 육옹과 임사영이 조서를 가지고 오다
조선에서 임금이 바뀌면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 그리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태조가 즉위했을 때 명나라에서 허락을 잘 안 해줘서 골치 아팠던 적이 있었다. 외교적으로 형식상 왕래하는 것이긴 하지만, 만약 거부를 해버린다면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와의 관계는 좋게 가는 것이 나았다.
이번에 사신이 온 것은 명나라 두 번째 황제인 혜종이 보낸 것이었다. 사신은 태종의 극진한 접대에 적잖은 감명을 받았는지 시를 쓰기 시작한다.
2월 12일 중국 사신 육옹이 시 3편을 올리다
2월 14일 태평관에서 사신들과 차를 들다. 육옹이 《강풍조수도》를 그리다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들과 더불어 다례(茶禮)를 행하고, 설미수(偰眉壽)를 시켜 사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주 뵈려고 하나, 동작(動作)을 번거롭게 할까 두렵다."
고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들도 또한 자주 왕궁에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안질(眼疾)이 낫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감히 못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임금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왕림[枉駕]하여 주기 바란다."
고 하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말로 다음에 한 번 봐요,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어요 같은 느낌으로 말했던 것인데, 친밀감이 높았는지 또 시를 한수 쓴다.
2월 30일 백관을 거느리고 영빈관에서 사신 육옹과 임사영을 전송하다
정몽주와 시 배틀을 했던 이력이 있는 태종으로써는 입이 근질근질할 찰나, 사신이 떠난다 하니 답시로 배웅한다.
"봄이 오니 초목이 바야흐로 꽃답고 고운데,
만리 길에 구치(驅馳)하여 홀로 수고가 많도다[賢勞].
크게 성은(聖恩)을 펴서 해국(海國)에 임(臨)하였고,
도로 사절(使節)을 데리고 운천(雲天)에 오르는도다.
서로 만난 지 며칠 동안에 서로 친해진[傾蓋] 것이 기뻤고,
오늘 아침에 전별(餞別)의 자리를 여는 것이 한스럽도다.
진중(珍重)하게 주는 말을 모름지기 기억하여,
윤명(綸命)을 반포(頒布)하여 다시 와서 전하기 바라는도다.
문채있는 비단[綺]과 향기로운 깁[羅]이 곱고도 선명하여,
영광스럽게 반사(頒賜)함에 근신(近臣)의 어짊[賢]을 보았도다.
넓고 큰 성군(聖君)의 덕택은 깊기가 바다와 같고,
감격의 성심(誠心)은 위로 하늘에 이르리.
봄이 건곤(乾坤)에 가득하였으니 보력(寶曆)을 받았고,
해[日]가 준조(樽俎)에 임(臨)하였으니,
처음 자리[初筵]가 질서가 있었도다.
그대 돌아가거든 나의 간절한 정성을 주달(奏達)하소서.
원컨대 동번(東藩)을 지키어 영세(永世)에 전하고져.“
시 중독자 육옹이 가만있었을 것 같은가? 역시 답시를 적는다. 답시의 답 시인 셈이다. 조선을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아쉽게 여겼던 것 같다. 이후로도 두 번의 시를 더 쓴 육옹이었다.
태종이 문무에 능통하였기에 가능했던 사귐이었다. 명나라 태조였던 주원장에게도 이쁨을 받았던 태종이었으니 사신의 환심을 가지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황제의 사신을 정성스럽게 환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다. 태종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어김없이 활용했다. 과연 사신은 황제에게 태종의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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