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1년 1월 14일 문하부 건의로 인재 등용·변정 도감 폐지·둔전 폐지 방안 등을 채택
태종이 즉위하면서 그 만의 기틀을 잡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즉위하기 22주 전 이미 신하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던 상황이었다. 신하들은 개혁안을 제시했고, 곧이어 숙제 검사가 이뤄졌다. 이날 실록에서는 총 세 가지의 기사가 나온다. 처음으로 문화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했다.
1. 종친과 신하들은 궁궐 출입 시 예복을 갖추고 명소가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
2. 사헌부에서 사대부들을 엄중히 감독하고 시비를 가릴 것.
3. 천거한 신하와 나이 많은 수령을 임용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4. 변정도감을 없애고 그 일을 형조의 도관에 맡길 것
5. 순군만호부를 없애고 그 일을 형조에 맡길 것.
6. 경기도의 잡공을 줄일 것
7. 기인제도를 없애고 군사의 사병화를 없앨 것
8. 둔전을 없애고 백성들에게 피해 주지 말 것
9. 왕가의 무덤에 상시 관리자를 임명할 것
10. 불교 종파를 없애고 그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
명소 : 임금이 신하를 은밀히 부르기 위하여 발급한 증명패
조선이 건국된 지 약 10년이 흐른 상황. 아직까지는 고려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비 변정은 끝이 없고 사병이나 둔전 같은 전쟁의 분위기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나씩 고쳐가는 시기였고, 태종은 차근차근해 나가고 있었다.
1월 14일 참찬문하부사 권근이 치도 6조목을 임금에게 권고하다
다음으로 참찬문하부사 권근의 숙제였다. 문하부 소속이었지만 특별히 태종에게 올린다.
옛적에 문왕(文王)이 세자(世子)가 되어 왕계(王季)에게 조알(朝謁)하기를 하루에 세 번씩 하였다 합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동궁(東宮)에 계실 적에 태상왕(太上王)을 받들어 섬김이 정성과 공경이 갖추어 지극하였으니, 효도라고 할 수 있사오나, 문왕이 세 번 조알한 일에 비교하면 미치지 못함이 있습니다.
즉 날마다 효도하되 정성을 다했더라도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전에 인군(人君)이 매일 새벽에 조정에 앉아서 정사를 들었는데, 진(秦)나라 이세(二世)로부터 깊이 궁중(宮中)에 있어 환자(宦者)로 하여금 명령을 전하게 하였고, 수(隋) 양제(煬帝)가 또 닷새에 한 번 조회를 보았으니, 이것이 모두 나라를 망치는 정사입니다.
즉 청정을 부지런히 하라는 것이다. 청정이란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 새벽에 조정에 나오라고까지 한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항상 정전(正殿)에 나 앉으시어 종일토록 경사(卿士)를 접견하시고, 외임(外任)으로 나가게 되어 하직하는 자나 밖으로부터 와서 조회하는 자가 있으면, 관품(官品)의 귀천(貴賤)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접견(接見)을 허락하시어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맑은 물음[淸問]으로 들으시오면, 여러 신하가 모두 감격(感激)한 마음이 있고, 전하께서 두루 민간의 일을 알 것이오니, 그 이익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즉 조회하는 신하들을 모두 만나보라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커뮤니케이션을 앞선 내용과 더불어 언급한 것이다.
또 진강하는 신하들이 비록 모두 용렬한 선비이오나, 전하께서 배웠다고 일컫는 자들입니다. 날을 윤번(輪番)으로 교대하여 나와서 진퇴(進退)를 기다리다가, 분부가 없으시어 물러간 것이 여러 번이오니, 선비를 높이고 학문을 향하는 뜻이 너무나 가볍지 않습니까?
즉 부지런히 경연을 참여하라는 것이다. 경연 이야기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온다. 태종은 경연에 참여하겠다 하고 나가지 않은 적이 꽤나 있었나 보다..
한통(韓通) 이 주(周)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송(宋) 태조(太祖)가 추증(追贈)하였고,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원 세조(世祖)가 또한 추증하였습니다. 정몽주가 고려(高麗)를 위하여 죽었는데, 오늘에 홀로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
즉 고려를 위해 의를 다한 자들을 포상하라는 것이다. 비록 정몽주라도 공이 있으니 추증을 하라는 것인데, 임금으로써 과거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라는 것이다. 한낱 감정싸움은 그만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조(前朝) 이후 우리 국초(國初)까지 공이 있어 제사할 만한 사람을 추록(追錄)하여 치제(致祭)하는 법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백성에게 사랑을 남긴 자도 또한 그 고을에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을 들어주고, 모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귀신의 여제(厲祭)의 법은 일체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즉 제사에 신경을 쓰고 여제를 하라는 것이다. 여제란 제사를 받을 수 없는 귀신을 위한 제사를 말한다. 민생을 챙기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1월 14일 남양군 홍길민이 한양 환도와 언로를 열어 놓을 것을 건의하다
마지막으로 홍길민이 숙제를 올린다. 태종의 숙제가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정확히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언관(言官)이 따로 없고, 공경(公卿)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진언(進言)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내린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과인의 몸의 궐실(闕失)과 좌우의 충성하고 간사한 것과 정령(政令)의 잘잘못과 민생의 이롭고 병되는 것을 숨김없이 지적하여 진달하라.’ 하셨으니, 통감(痛感)함이 지극하여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사와 우러러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이때다 싶어 두 가지를 언급하는데, 첫 번째로는 도읍을 확실하게 한 곳(한양)으로 정하라는 것, 두 번째로는 신하와의 소통을 중요시하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서울과 과천에 행정부처가 나뉘어있는 것처럼, 이때도 아직 개성에서 머물러 있었다. 개성의 수창궁이 불에 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도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홍길민은 오로지 신하의 입장에서 불편한 사항을 언급한 것 같다. 마치 소원수리의 느낌이다. 즉위 2주 후 힘든 과제를 받은 태종, 과연 태종은 이 숙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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