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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임금이 왕우(王瑀)와 더불어 격구(擊毬)하면서 왕우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인아(姻婭)의 관계인 까닭으로 경(卿)을 용서한다.’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경(卿)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으므로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 경을 마전군(麻田郡)에 봉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 경의 형인 공양왕이 다만 욕심이 많기가 한량이 없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의 일이 있게 되었다." 하니, 왕우가 울면서 사례하였다.』 태조 2년(1393) 4월 4일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태조였기에 공양왕과 그의 친족들, 즉 왕씨 일가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역적모의가 벌어질 수도 있는 판국이었던 것이..
1일 1경연의 시작 『간관(諫官)이 날마다 경연(經筵)을 개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수염과 살쩍이 이미 허옇게 되었으니, 여러 유생들을 모아서 강론을 들을 필요가 없겠구나." 도승지 안경공(安景恭)이 대답하였다. "간관의 뜻은 다만 전하에게 글을 읽게 하려고 함이 아니옵고, 대개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바른말을 듣게 하려고 함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비록 경연(經筵)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매양 편전(便殿)에서 유경(劉敬)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게 하고 있다."』 태조 1년(1392) 11월 12일 경연은 고려시대 서연에서 이어진 것으로, 임금과 신하가 학문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이자 국정을 논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임금에게 신하가 간언을 하는 자리이니, 왕권견제의 수단이 될..
태조의 최측근 황희석 태조의 최측근 중 황희석이란 인물이 있다. 태조의 입을 빌려 알아보기로 하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황희석(黃希碩)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상시 휘하에 있으면서 방어한 공로가 있었다. 또 고려 왕조의 정몽주 등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대간(臺諫)을 몰래 꾀어서 충량(忠良)을 모함하여 해치려고 하던 즈음에, 내가 그 때 말에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간사한 무리들의 화가 거의 장차 나에게 미치려 하였으나, 곧 병졸을 훈련하여 나를 호위하고 그 간사한 모의를 저지시켰으니, 그 공이 크다.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 등이 나를 임금으로 추대할 때 마침 아버지 상사(喪事)를 당하여 비록 모의에 참예하지는 못하였지마는, 만약 희석(希碩)이 나를 방어한 힘이 없었다면 어찌 ..
직장동료의 선물 실록은 총서부터 시작한다. 총서는 임금의 출생부터 사망까지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인데 태조는 첫 임금이라 체계가 갖춰지기 전이어서 그런지 이후와는 다르게 즉위 전 까지만 언급되어있다. 그러다보니 태종의 젊은 시절 이야기도 다루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기사 하나를 가져와본다. 『전하(殿下)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에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 제학(密直提學) 이성중(李誠中)이 그 아들 휴(携)로 하여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니, 전하가 왕비(王妃)와 더불어 앉아서 이를 받았다. 왕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검(寶劍)을 보낸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데?" 하였다. 이튿날 전하가 성중(誠中)의 집에 가서 사례(謝禮)하기를, "나는 유학(儒學)을 닦은 선비인데..
프롤로그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 했어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었잖아 영조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었다며? 교과서를 보고 공부하거나, 강의나 여타 매체에서 들어서 조선 왕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다 너도 나도 알고 있는 조선 정치사 이야기들.. 그런데 그런 거 말고 새로운 건 없나?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이야기 말이다 내가 모르는 조선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지 않을까 그래서 원서를 읽어보기로 했다 광범위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 작업을 시작 해볼까 한다 국사편찬위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다 해놨기 때문에 아주 편하게 볼 수 있다 홈페이지는 여기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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