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전체 글

(881)
격구를 놓칠 수 없어! 3월 13일 대사헌 조박에게 격구하는 까닭을 말하다 태조도 그렇고 정종도 격구를 참 좋아한다. 임금이 돼서도 무신의 기질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연 끝나면 격구하고, 손님이 오면 같이하고, 아프다가도 낳으면 바로 격구하고... 조박이 걱정돼서 계속 격구 하는 것을 말린다. 과격하게 하지 마라, 환시나 간사한 소인 무리와 함께하지 마라 등등. 정종은 눈치가 보였는지 ‘격구 하지 않으면 죽는 병’ 같은 느낌으로 이유를 말한다. 임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조박의 심란한 마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과인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잠저(潛邸) 때부터 밤이면 마음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숙부와 형제들이 게으르다고 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경계하고 ..
경연에 첫 출근한 사관 정종 1년 1월 7일 사관이 비로소 경연에 입시하다 경연에 드디어 사관이 입시하게 된다. 대사헌 조박의 청으로 경연에 사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박은 경연의 진강을 주관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관의 평가가 너무 박하다. 왜? 조박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인군의 착하고 악한 것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 조박이 일찍 예궐(詣闕)하여 무신(武臣)과 더불어 장기를 두다가, 진강(進講)할 때에 이르러 책을 펴고 읽는데 그 글의 귀절도 능히 떼지 못하였다.
연호 시행일의 숨겨진 이야기 정종 1년 1월 1일 명나라 건문 연호를 비로소 시행하다 근일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승하(升遐) 하시고, 금상 황제(今上皇帝)께서 유조(遺詔)를 받들어 제위(帝位)에 오르시어 명년(明年)을 건문(建文) 원년(元年)으로 하고 이를 이미 천하에 포고(布告)하였다. 태조 7년(1398년) 12월 22일 명나라에서 혜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새 연호인 건문을 사용해야 했었는데... 사실 건문을 사용하라는 명나라의 통보는 정종이 즉위하기 전에 이미 받은 상태였다. 태조는 물러나기 일주일 동안 명나라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명나라 주원장의 명복을 빌기 위해 3일 동안 상복을 입기도 하고,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도 보내기도 했다. 명나라에서 2번째 황제가 즉위하자 조선에서도 2번째 임금이 즉위한 상황이..
실록 최초의 효녀 진원군(珍原郡) 백성의 딸 도리장(都里莊)이 그 부친이 성 쌓는 역사에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아무 형제도 없으니 내가 가서 보아야 혹시나 살아 돌아오실 것이다." 하고, 남복(男服)으로 바꿔 입고, 즉일로 길을 떠나 길가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꼭 들어가서 보았다. 판교원에 이르러 그 부친을 보게 되었는데, 병이 위태하므로 마음껏 구료해서 부축하고 돌아오니, 고향에서 효녀라고 칭찬했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리게 되어 도리장에게 면포(綿布)를 내려 주었다. 태조 5년 3월 4일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효녀가 바로 도리장이다. 도리장은 외동딸이었다. 아버지가 성을 쌓으러 갔다고 했으니 일반 백성이었을 것이다.전에도 언급했듯이 이 시기 축조..
세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세자가 서연(書筵)에서 강(講)을 마치자, 여러 강관(講官)이 모두 나갔는데, 우보덕(右輔德) 함부림(咸傅霖)이 나와서 말하였다. "들은 바가 있사온데 고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세자가 대답하였다. "할 말은 다 하시오." 함부림이 말하였다. "창기(娼妓)가 궁중에 출입한다는데 참말이옵니까?" 세자가 무안한 얼굴로,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겠소." 하였다.』태조 5년(1396) 1월 24일 세자였던 이방석은 태조의 7번째 아들이었다.수많은 왕자들을 뚫고 태조의 간택으로 세자가 되었다.태조의 사심이 가득했던 세자책봉이었다. 하필 7번째 아들이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나머지 왕자들이 불만이 많았다.또힌 장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정통성이 어긋나있던 상황이었다.이방석은 이러한 자신에 대한 불만을..
스님, 힘 좀 쓰셔야 겠네요 태조실록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궁궐 축조 관련한 기록이다.아무래도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수도를 옮기면서 대량의 축조가 필요했다.궁궐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일반 백성들이 주 타깃이었다. 그러나 동원만으로 부족해 남아도는 인력을 이용한다.한 때 지위가 막강했지만 고려 멸망 이후 꿰어진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린중, 스님을 궁궐 축조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명하여 서소문(西小門)을 고쳐 짓도록 하고, 석장(石匠)인 중[僧]의 머리를 베어 그 위에 매달아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였다.』태조 3년(1394) 2월 15일 궁궐을 짓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응당 책임자를 처벌한다.그러나 유독 스님에게는 혹독하게 대했다.처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려버렸다. 『중추원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