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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조실록

1일 1경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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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諫官)이 날마다 경연(經筵)을 개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수염과 살쩍이 이미 허옇게 되었으니, 여러 유생들을 모아서 강론을 들을 필요가 없겠구나."

 

도승지 안경공(安景恭)이 대답하였다.

 

"간관의 뜻은 다만 전하에게 글을 읽게 하려고 함이 아니옵고, 대개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바른말을 듣게 하려고 함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비록 경연(經筵)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매양 편전(便殿)에서 유경(劉敬)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게 하고 있다."』

태조 1년(1392) 11월 12일

 

 

경연은 고려시대 서연에서 이어진 것으로, 임금과 신하가 학문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는 자리이자 국정을 논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임금에게 신하가 간언을 하는 자리이니, 왕권견제의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이걸 매일 하자고 하니 태조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앞의 기사를 보면 태조는 나이가 많고 경연 안 해도 충분히 공부하고 있는데 할 필요 있느냐는 식이다. 태조는 경연을 싫어했다고 해석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이틀 만에.

 

『더구나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 되니, 전하께서 만약 경연(經筵)을 급무(急務)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뒷 세상에서 이를 핑계하여 구실로 삼아, 그 유폐(流弊)는 반드시 학문을 하지 않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와서 《대학(大學)》을 가져와 강론하게 하여, 격물 치지(格物致知)·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연구하여 수신 제가(修身齊家)·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효과를 이루게 하소서."』

태조 1년(1392) 11월 14일

 

 

사간원이 이토록 악랄하고 끈질겼으며 강력했다. 훗날을 핑계 삼아 압박하다니! 결국 신하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태조였다.

 

이때부터 조선의 임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매일 경연을 해야 했다. 후대 임금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태종은 경연을 기피했고, 세조와 연산군은 아예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재위기간 중 손에 꼽을 정도로만 했을 뿐이다. 반면 경연을 압도적으로 참여했던 임금들도 있었다. 문에 능하고 신하들과 사이가 좋았던 임금, 바로 세종과 성종이었다.

 

경연에 갔더니 어느 신하가 뭘 주장해서 어쩌구저쩌구... 이런 사건들을 제외하고 단순히 실록에서 경연에 나간 기록만 보더라도 엄청난 횟수가 나온다. 마치 일기 쓰듯이 별일이 없을 때마다 간략하게 언급되는 한마디.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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