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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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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 관리 구타사건 태종 3년 11월 22일 사헌부 관리들과의 충돌로 갑사들이 신문고를 치다 하연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는 신하였는데, 갑사들을 놀리는 발언을 했다. "갑사의 직책이 낮고 천하니, 어찌 세음 자제(世蔭子弟)가 할 것이냐?" 한 두 명이 아니라 갑사 전체를 욕한 것이었기 때문에 갑사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이날 조회가 끝난 후 갑사 10여 명이 하연에게 달려가 때렸다. 그런데 맞은 사람은 하연이 아니었다. 갑사들이 잘못 보고 신계삼을 구타한 것이었다. 이른바 사헌부 관리 구타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헌부에서는 갑사를 잡아다 힐문하고 자백서까지 받았다. 갑사들은 사헌부에서 자신들을 너무 심하게 다룬다고 생각해 태종에게 항의한다. "지금 갑사가 감찰을 촉범한 이유로 구박(拘縛)이 너무 심하니, 궁문(宮門)을 ..
매사냥 좀 하자 태종 3년 9월 25일 단기로 이숙번 등과 갑사30여 명을 데리고 동교에 몰래 나가 매사냥을 하다 신하들은 태종이 사냥하는 것을 탐탁치않게 여겼다. 눈치를 주는 신하를 뒤로하고 태종은 동교에 몰래 매사냥을 한 것을 자랑한다. 답답한 신하들은 태종을 말린다. 이저 : 전 말을 잘 못 타서 사냥하지 않습니다. 태종 : 나이도 젊은데 왜 말을 못타? 매로 사냥하는 거 즐겁네~ 이저 : 매가 새를 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주상께서 다시 나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태종 : 말 못 탄다는 거 거짓말이구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네. 다음날 신하들은 사냥을 그만두라고 상소를 올린다. 대간, 사헌부 : 몰래 사냥 가시니 전부 놀랐습니다. 가지 마세요. 태종 : 교외에 기러기 떼가 있다고 해서 갔지, 지금은 매우 후회..
조운선 침몰은 내 탓이야 태종 3년 5월 5일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바다에 침몰되다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바닷속에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은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깎고 속세를 벗어나려고 했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태종은 매우 안타까워한다. "책임은 내게 있다.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 사헌부는 삼도체찰사 임정과 경상도 수군절제사 노중제가 감독을 제대로 안 하였다고 했으나 태종은 무죄로 판단했다. 이 사건 이후 태종은 해로가 아닌 ..
송충이를 잡자 태종 3년 4월 21일 만여 명을 동원, 송악산 골짜기의 송충이를 잡다 태종 대에 송충이가 유독 많았나 보다. 아니면 태종이 송충이를 유독 싫어했거나. 태종실록에서 송충이 잡는 기사가 정말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태종 : 송충이는 어느 시대부터 있었지? 김한로 : 고려 원종때 3백 명이 잡았다고 하네요. 태종 : 송충이 잡는 건 인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네? 태종은 신하 만 여명을 송충이 잡기에 동원시켰다. 송충이를 한 사람이 석 되 정도를 잡았다고 한다. 제릉에는 팔뚝같이 크고 길이가 한 자 크기가 팔뚝 같고, 길이가 한 자나 되는 송충이가 있었다고 한다. 태종 : 송충이 잡는거 어떻게 됐어? 조영무 : 거의 다 잡고, 송악산 일부만 남았어요. 태종 : 거봐, 내가 말 안 했으면 어쩔뻔했어?
내가 공부하는 걸 사람들이 다 아는데 태종 3년 3월 3일 사간원에서 경연에 힘쓸 것과 태자의 교육 및 학문 진흥 등에 관해 건의하다 사간원에서는 임금이 틈을 보이면 그 즉시 상소문이 올라갔다. 이번엔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자. 1. 경연한다고 해놓고 왜 계속 안 합니까! 2. 원자를 학궁에 입학시키고 좋은 선생님을 붙이세요! 3. 권근에게 모든 걸 맡기려 하지 말고 신규로 선생들을 뽑아 국학교육에 힘쓰세요! 태종은 ‘다 맞는 말이지만 매일 경연 참석은 좀 그래…’라고 했으나 안 통했다. 신하들은 태종을 설득시키기 위해 계속 권고한다. 전하께서 나이 40이 못되시었으니, 정히 도(道)가 밝아지고 덕(德)이 설 때인데, 나이가 이미 때가 지났다고 말씀을 하시니, 전하께서 장차 소성(小成)에 만족하시어 진발(振拔)해 대성(大成)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자소 설치하는 데 돈이 없네? 태종 3년 2월 13일 주자소를 설치하고, 이직·민무질·박석명·이응을 제조로 삼다 이전에 태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원자의 교육을 위한 서적들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책을 사서 쓸 만큼 국내에서 만드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다. 태종이 주자소를 지으면서 대학연의, 경제육전 등 많은 책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자소의 경비는 어떻게 충당했을까? 물론 궁궐 자체에서도 내었지만 신하들에게 기부를 받았다. 이른바 삥을 뜯은 것이다. 내부(內府)의 동철(銅鐵)을 많이 내놓고, 또 대소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자원(自願)해서 동철을 내어 그 용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시키는 데 자원이 웬 말인가! 아마도 고위 관료들 위주로 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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