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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 대처하는 법 정종 2년 6월 2일 임금이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려 사흘 만에 그치다 신하들은 가뭄이 들자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 것이라며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 노비변정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종에게는 조심히 근신하여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인식이 그랬다. 가뭄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신하가 사직하기도 했던 시대였다. 놀라운 건 정종이 그렇게 하니 비가 왔다는 것이다. 이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구(恐懼) 수성(修省)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밤이 되어서 비가 내렸다.
사병을 혁파하라 정종 2년 4월 6일 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 사병(私兵)을 혁파하였다. 태조가 의흥삼군부를 만들었으나 건국 초기여서 사병을 다 없애지 못했다. 왕자의 난도 사병을 활용한 것이었으니, 정안군이 세자가 된 만큼 이젠 혁파를 해야 했다. 사병을 혁파하고 의흥삼군부로 귀속시키는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병기를 즉시 수납하지 않기, 삼군부의 공문을 가지고 간 사령을 때리기, 군관의 패기를 반납하지 않기, 세자 뒷담화하기, 사병 숨기기 등등 말을 듣지 않았다. 패기 : 사병에 소속한 군인들의 군적을 기록한 장부. 여말 선초에 사병을 거느린 자는 각기 따로 패기를 가지고 있었음. 이들은 대부분 공신들이었기 때문에 정종은 귀양 보내기를 꺼려했다.
마 내 매형이 누군지 아나? 정종 1년 9월 4일 문하부에서 사헌부 잡단 민공생을 논핵하다 민공생은 사헌부 관리인데 5품관이었으나 매형이 이방간이었다. 장사정 사건 당시 논핵을 낭사로 떠넘긴 인물이었으며 임금의 허가 없이 사헌부에 재출근을 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낭사에서 법대로 하지 않았다고 이를 비판했다. 민공생은 매형에게 일러바치고, 정종에게도 압력이 들어간다. 동생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정종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상소(上疏)하는 말을 거만하게 하지 말고, 금일 이전에 탄핵을 당한 자는 거론하지 말며, 풍문(風聞)으로 들은 의심스러운 일도 탄핵하지 말라."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하지 마, 알았지? 그래서 민공생을 재임용하니 낭사가 또 탄핵했다. 말로만 하지 말고 글로 남기라고. 법대로 하라니깐 어명으로 퉁..
공신들의 기이한 행동들 정종 1년 5월 16일 조박을 이천에 조휴를 해주에 귀양 보내다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처제(妻弟) 방석의 기생첩 효도(孝道)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그 아비 이거이(李居易)가 일찍이 관계한 여자이다. 부자간에 한 여자를 간음하여 천상(天常)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으니, 이것은 논핵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조박을 포함한 공신들은 다들 한 명씩 기생을 취했다. 이건 단순한 트집 잡기에 불과한 사안이었다. 공신들 사이에 알력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논핵의 당사자인 이저가 알아차리자 정종에게 직접 고한다. "헌사(憲司)에서 신을 무고하여 해치려 하니, 신은 대죄(待罪)하고 있겠습니다." "나를 해치려고 꾀한 자는 조박입니다. 정사(定社)의 회맹(會盟)한 피가 입에서..
격구를 하지마라고? 정종 1년 5월 1일 문하부에서 올린 시무(時務) 10개 조에 관한 상소문 문하부에서 시무 10조를 올렸는데 요약해보면 이렇다. 1. 태조에게 매일 문안하여 효를 다하라 2. 직책에 맞는 인재를 채용하라 3. 검교직 폐지 등 국고 낭비를 하지 마라 4. 경연의 질을 높여라 5. 격구를 하지 마라 6. 서경과 고신을 강화하라 7. 상의원을 개혁하라 8. 별안색을 혁파하라 9. 국고를 엄격히 관리하라 10. 대면보고를 늘려라 별안색 : 궁중에서 말안장의 제조를 맡아보던 임시 관아. 후에 공조에 소속됨.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격구의 금지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격구는 원나라에서 벼슬하던 신하들이 태조에게 추천했던 것이었으니, 망한 원나라의 것을 따라 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정종은 사관을 내보낼 정도로 화를..
개성으로 가자! 정종은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종에게 2월은 도읍을 옮기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는 달이었다. 우선 제릉으로 간다. 사실 제릉은 미끼였고 주목적은 유후사에 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가는 도중에 태조에게 노루를 선물로 드리기도 했다. 하늘의 기운이 모아지는 것일까, 정종이 수도를 떠난 후 이상한 일들이 나타난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경기 안의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松都)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합니다." 정종은 결국 개성으로 갔다. 본인의 결정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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