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hapter1/태조실록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728x90


『임금이 왕우(王瑀)와 더불어 격구(擊毬)하면서 왕우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인아(姻婭)의 관계인 까닭으로 경(卿)을 용서한다.’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경(卿)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으므로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 경을 마전군(麻田郡)에 봉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 경의 형인 공양왕이 다만 욕심이 많기가 한량이 없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의 일이 있게 되었다."

 

하니, 왕우가 울면서 사례하였다.』

태조 2년(1393) 4월 4일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태조였기에

공양왕과 그의 친족들, 즉 왕씨 일가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역적모의가 벌어질 수도 있는 판국이었던 것이다.

태조는 이들과 친분을 쌓고 인연을 유지하며

자신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공양왕의 동생이었던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하고

그의 딸을 무안군 이방번에게 시집을 보내 왕실종친으로 만든다.

신하들은 왕우가 언젠가 반역할 것이기 귀

향을 보내자고 해도 그러지 않았다.


실록에는 태조가 왕우와 격구를 여러 번 한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고위관료들이 골프를 치는 것과 같은 스포츠였다.


격구를 하면서 친목을 다지기도 하고 위의 사료에서처럼

모든 탓이 공양왕에게 있다고 하며 왕우에게는 탓을 하지 않은 것처럼

격구는 정치적, 감정적으로 얽혀있는 실타래를 푸는 작업을

대체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줄곧 신하가 성토해도 왕우를 비호했던 태조.

고려왕조에 대한 동정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완강함은 왕우가 죽는 날까지 지속됐다. 

반응형

'chapter1 > 태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이라 불리게 되다  (2) 2018.09.15
왕씨 모반사건  (4) 2018.09.11
1일 1경연의 시작  (0) 2018.09.06
태조의 최측근 황희석  (0) 2018.09.05
직장동료의 선물  (0) 201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