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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조실록

왕씨 모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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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새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조의 마음은 불안했다.

고려왕조를 다시 세우고 싶다는 열망,

언젠가 터질 그 열망이 조선에 잔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어이 사건이 터진 것은 태조가 조선을 세운지 3년이 되는 때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동래 현령(東萊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이 국가의 안위(安危)와 왕씨(王氏)의 명운(命運)으로써 밀성(密城)의 장님[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을 쳤는데, 일이 발각되자, 흥무(興茂)를 잡아 와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성헌(省憲)과 형조(刑曹)로 하여금 순군 만호부(巡軍萬戶府)와 함께 그 일을 조사하게 하니, 흥무가 죄를 자백[伏罪]하였다.

"가행(可行)과 중질(仲質) 등이 박위(朴葳)의 말로써, 와서 점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고려 왕조 공양왕의 명운(命運)이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보다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王氏)의 가운데서 누가 명운(命運)이 귀한 사람인가?’ 하므로, 내가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명운이 귀하다 하고,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琚)가 그 다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위를 가두고 순군(巡軍)에게 명하여 가행과 중질을 경상도에서 잡아 오게 하였다.

태조 3(1394) 116


박위는 개국공신이었다. 고려왕조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왕씨의 명운을 물어본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예상해본다.

첫째, 김가행 일행의 단독범행일 가능성.

이흥무는 밀성의 장님이었다. 밀성은 지금의 밀양인데, 박위의 본관이기도 했다.

밀양에서 박위는 장님도 알 정도로 매우 유명했을 것이다. 밀양에서 배출한 인물, 그러니까 개천에서 용난 인재였기 때문에 김가행 일행은 점을 보기에 수월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위의 이름을 판 것이 된다.

둘째, 실제로 박위가 연루되었을 가능성.

이른바 유도심문처럼 왕씨의 명운을 따져 왕화와 왕거의 이름이 나오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꼬투리를 잡아 직접 태조에게 일러바쳤을 수도 있다. 다만 형조와 순군부에게 선수를 뺐겼을 뿐.


어찌됐건 흥무에게 언급된 왕화와 왕거는 장님 점쟁이의 말 한마디에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순군 진무(巡軍鎭撫) 김영화(金永和)와 천호(千戶) 유양(柳陽) 등을 보내어 왕씨(王氏)를 거제도(巨濟島)로 옮기게 하고, 또 대장군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왕화(王和)와 왕거(王琚)를 안동옥(安東獄)에 가두게 하였다.

태조 3(1394) 117

 

감옥에 갇히는 순서는 이렇다

이흥무 -> 박위 -> 김가행, 박중질 -> 왕화, 왕거

흥무의 자백 이후 불과 이틀 만에 일거에 연루된 자들을 소탕한 것이다.

다음날 감옥을 나온 자는 박위 혼자였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박위(朴葳)에게 술을 내려 주고, 명하여 수갑을 풀어주게 하고 개유(開諭)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경()이 어찌했겠는가? 중질(仲質)과 가행(可行) 등이 오기를 기다려 변론(辯論)한다면 석방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사직(社稷)에 관계되기 때문에, 내가 사정(私情)을 쓸 수가 없으므로 경()에게 옥()에 나아가도록 명한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비록 큰 죄일지라도 모두 용서하는데, 하물며 경()에게 있어서랴! 경은 동심(動心)하지 말라."

태조 3(1394) 118

 

박위가 실제로 모반을 하려 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태조는 개국공신이었던 박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이전의 왕우처럼 전형적인 자기사람 챙기기를 보여준다.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 글을 같이 올려 청하였다.

"신들이 순군 만호부(巡軍萬戶府)와 같이 이흥무·김가행·박중질 등을 국문(鞫問)하니, 그 공사(供辭)가 대체(大體)에 관계되므로 쉽사리 판결할 수가 없겠습니다. 원하옵건대, 공사(供辭)에 관련된 사람들은 한 곳에서 증거를 대어 심문하여 밝게 그 죄를 처단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박위(朴葳)를 용서하여 복직(復職)시키고, 이어 말하였다.

"박위가 비록 본디부터 배반할 마음이 있었더라도, 지금 내가 높은 작위(爵位)를 주어서 대우하기를 후하게 하였으니, 어찌 변고(變故)를 감히 도모했겠는가? 박위와 같은 인재(人材)는 쉽사리 얻을 수가 없다."

박중질·김가행·이흥무 등은 곤장을 쳐서 변방 고을에 귀양보내었다.

태조 3(1394) 121

 

다른 관점으로 보면, 좋지 않은 사건이 터졌을 때 아랫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모습이다.

이른바 꼬리자르기로 보일수도 있는데, 임금에게 권력을 비호 받는 공신을 누가 벌 줄 수 있겠는가?

 

이게 불과 5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조선에서는 그만큼 왕씨 모반사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전부터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박위의 모반사건을 시작으로 왕씨의 씨를 말려야한다는 간언이 빗발쳤다. 3개월 동안.




대간과 형조에서 나아와 아뢰었다.

"신 등은 전일의 청한 일을 윤허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 관청에서 장소(章疏)를 같이 올리는 것을 이미 일찍이 금했는데, 따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처음에 대간과 형조에서 비록 여러 번 소()를 올려 왕씨(王氏)를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마음으로 차마 할 수 없어서 그 청을 윤허하지 아니했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궐 문앞에 엎드려 힘써 간()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 임금이 도평의사사에 명하였다.

"왕씨를 제거하는 일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니, 마땅히 대소(大小) 각 관사(官司)와 한량(閑良기로(耆老)를 모아서 각기 가부(可否)를 진술하게 하여 단단히 봉하여 바치게 하라."

도평의사사에서 모든 관사와 기로들을 수창궁에 모아서 알리기를,

"전조(前朝)의 왕씨는 천명(天命)이 이미 가버리고 인심이 이미 떠나서, 스스로 하늘이 하는 주벌(誅伐)을 초래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호생지덕(好生之德)으로써 생명을 보전해 주었으니 은덕이 지극히 중하온데도, 왕씨들은 도리어 의심을 내어 몰래 반역을 도모했으니 법에 용납될 수가 없다. 그 왕씨를 구처(區處)할 일을 단단히 봉하여 계문(啓聞)하라."

하니, 이에 양부(兩府) 각 관사와 기로들이 모두 말하기를,

"왕씨를 모두 제거하여 후일의 근심을 막게 하소서."

하였는데, 다만 서운관(書雲觀전의(典醫요물고(料物庫)의 관원 수십 인만이 마땅히 해도(海島)에 귀양보내야 된다고 하므로,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전지(傳旨)하였다.

"왕씨를 구처할 일은 한결같이 각 관사(官司)의 봉해 올린 글에 의거하게 하나, 왕우(王瑀)의 삼부자(三父子)는 선조(先祖)를 봉사(奉祀)하는 이유로써 특별히 사유(赦宥)한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형조 의랑(刑曹議郞) 함부림(咸傅霖)을 삼척(三陟)에 보내고, 형조 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대장군 오몽을(吳蒙乙)을 강화(江華)에 보내고, 형조 전서(刑曹典書) 손흥종(孫興宗)과 첨절제사(僉節制使) 심효생(沈孝生)을 거제도(巨濟島)에 보내었다.

태조 3(1394) 414

 

결국 태조가 손을 든다. 왕씨를 더 이상 비호할 수가 없었다.

모반사건까지 터지면서 신하들의 요구가 빗발쳤고,

상소를 막으면서까지 왕씨를 제거하는 데 반대했던 태조였지만

결국 막을 수는 없었다.

왕우에게만 불똥이 튀지 않도록 했을 뿐이었다.




이로써 왕씨 역모사건은 막을 내린다.

조선은 더 이상 고려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남아있는 왕씨는 모두 다른 성씨로 바꿨고

앞으로 조선을 단단하게 세울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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