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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1/태조실록

외교 전문 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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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태조3년(1394) 6월 1일


 

정안군은 훗날 태종이다.

명나라에 왕자가 가는 것은 모험이었는데, 볼모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가게 되는 건 아마 최후의 보루이지 않았을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해결사가 될 카드 말이다.

그런데 체질이 허약하다니... 부모의 마음은 똑같은가 보다.

 

6월 7일 정안군은 표문을 단단히 준비하고 명나라로 간다.

그 사이 왕래가 막히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데

7월 13일 중국과 틀어진 이유가 중들 때문이라면서 서북면 왕래를 막고 걸리면 죽였다.

조선 초기는 유독 중들에게 가혹한 시기였는데 이번에도 뜬금없이 명나라 가는 것을 막는다.

명나라와의 관계가 회복이 된다면야 중들 목숨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야말로 철저하게 명나라에게 납작 엎드린 것이다.

다행히 정안군 일행은 무사히 돌아온다.

 

『태종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남재와 조반도 같이 왔다. 태종이 명나라 서울에 이르니, 황제가 두세 번 인견하였는데, 태종이 소상하게 〈사신 통행에 대하여〉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우대하고 돌려 보냈다. 처음에 태종이 떠날 때 찬성사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태종을 전송하였다.

 

"자식을 알고 신하를 아는 예감(睿鑑)이 밝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성의(誠意)는 백성을 살리기 위함이라. 모두 말하기를 만세의 조선 경사는, 이 더위와 장마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가는 데 있다 하더라."

 

명나라 선비들이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 세자라 하면서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태종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뒤에 태종이 흠차 내관(欽差內官) 황엄(黃儼)을 보고 물었다.

 

"옛날 태종 황제를 연부에서 볼 때에 모시고 섰던 사람이 누구냐?"

 

엄이 대답하였다.

 

"경 대인(慶大人)인데, 온순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황제가 제일 신임하던 사람이나,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태조3년(1394) 11월 19일


 

진즉에 정안군을 보냈어야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대받는다. 정안군의 눈치도 빛을 발했다.

정안군, 훗날 태종의 입장에서 보자.

막혔던 사신왕래를 풀었고, 황제에게 잘 보였으며, 명나라 선비들이 자신을 조선의 세자라고 불렀다.

자기의 능력을 온 천하에 알린 것이니 기고만장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면? 일개 왕자일 뿐이었다. 세자는 따로 있었다.

능력 있는 사람이 그만한 위치에 올라가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어땠을까.

왕자의 난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 덕에 사신 통행이 원활해지게 되었다.

 

『"신의 아들 이방원 등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삼가 선유(宣諭)를 받자오니, 폐하의 가르치심과 경계하심이 절실하고 지극하여 감격해 마지 않는 바이매, 거룩하신 훈계가 밝으시고 갸륵하신 은혜가 넓으시니, 몸을 어루만져 감격함을 알고, 온 나라 백성이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금년 6월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신의 자식 이방원과 배신(倍臣) 남재와 조반 등을 경사에 보내서, 다행하게도 폐하를 면대하는 영광을 얻고, 특히 신에게 민생을 구휼하고 천명을 경계하라는 조칙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감복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이제 황제 폐하의 민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인자한 마음과 먼 사람을 포섭하시는 넓은 도량을 만나, 한구석 멀리 있는 나라로 하여금 편안히 살게 하는 덕을 입게 하오니, 신은 길이 충의(忠義)의 뜻을 굳게 가지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겠나이다."』

태조 3년(1394) 12월 10일


 

황제가 마음이 풀렸으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이렇게 근 1년간 조선을 괴롭혔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마무리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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