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 훗날 영락제와의 인연
명나라에서 연왕에 의해 정난의 변이 발생한 시기에 실록에도 그 정세와 여파가 기록되어있다. 연왕과의 인연이 있었던 태종, 그 타임라인을 따라 가보자.
태조 3년 11월 19일 태종이 명나라와의 막힌 외교를 뚫었던 그 시기에 연왕과 무난하게 친목을 다졌던 태종이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조 4년 11월 6일 연왕이 ‘왜 자기에게는 말을 보내지 않느냐’고 해서 명나라를 갈 때 말을 주었다. 그랬더니 명나라 황제가 ‘왜 연왕과 교류하냐’면서 송희정과 권을송을 유배보냈다. 황제와 연왕의 신경전이 표면적으로 나타났던 사건이었다.
정종 1년 3월 1일 정난의 변이 발생한 것을 조선에서도 알게 되었다. 명분은 주원장에 대한 제사였다.
"연왕(燕王) 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에게 제사지내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경사(京師)에 갔는데, 새 황제(皇帝)가 단기(單騎)로 성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연왕(燕王)이 곧 돌아와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 곁의 악한 사람을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위명(爲名)하고 있습니다."
정종 2년 5월 17일 당시의 혼란한 중국 정세를 삼국지의 고사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촬요(撮要)》를 강론하다가,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우금(于禁)을 보내어 위(魏)나라에 항복하기를 구하니, 위나라 임금은 허락하고자 하는데, 유엽(劉曄)이 간하였다’는 데에 이르러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이 임금에게 묻기를,
"위주(魏主)와 유엽(劉曄) 중에 누가 옳았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엽의 간한 것이 옳았다. 위주(魏主)가 간하는 것을 좇지 않고 오나라의 거짓 항복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대단히 잘못이었다."
하였다. 전백영이 말하기를,
"지금 연왕(燕王)이 군사를 일으켜 중국이 어지러워졌는데, 설혹 정료위(定遼衛)가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구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아니하시겠습니까?"
정종 2년 9월 19일 연왕이 승리하고 황제가 패배하는 형국이었다.
"왕실(王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연왕(燕王)이 승승 장구(乘勝長驅)합니다."
태종 1년 8월 12일 명나라 황제가 연왕에게 지고 퇴각할 때 기병보다 보병이 먼저 도망쳤다고 한다. 기이한 상황인데 그만큼 기병의 말의 질이 나빴던 것이다. 알고 보니 나쁜 말은 모두 사윤 공부가 바꿔준 것이었다. 공부가 황제에게 바치는 말을 의주에서 점검할 때 풍해도 사람이 말 교환 제안을 했다. 공부가 그 차액을 이득보기 위해 바꿔줬던 것이다. 황제가 처벌하고자 하니 태종이 공부의 죄를 벗기려고 서장관으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나쁜 말은 핑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황제는 연왕에게 연전연패를 하고 있었다. 전투에 지고 그 화풀이를 엄한 곳에 했던 것일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태종 1년 12월 9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서, 안원이 돌아와 황제가 연왕을 치기위해 군사를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여전히 명나라는 전쟁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 2년 3월 6일 연왕이 명나라의 수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연병(燕兵)의 기세(氣勢)가 강하여, 이기는 기세를 타서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帝兵]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태종 2년 3월 14일 연왕의 명나라 공격으로 요동에서 도망 온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하들 중 일부는 이들을 믿지 못하여 되돌려 보내라고 주장했다. 이쯤 사신으로 들어왔던 축맹헌이 명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요동의 소란으로 길이 막혀 못가기도 했다. 축맹헌은 한 달 넘게 조선에 체류했다.
태종 2년 9월 28일 드디어 연왕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태종은 꿈을 기가 막히게 꾸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고명과 서신을 받을 때도 꿈 얘기를 하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꿈에 중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내가 사람을 시켜 성지(聖旨)를 전사(傳寫)하게 하여 보았으니, 중원(中原)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정난의 변 이후 연왕이 명나라를 통치하면서 조선에서 쓰던 연호도 건문에서 영락으로 바뀌게 되었다. 과연 태종은 명나라의 새 황제와 외교적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