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영화 리뷰

봉오동 전투 영화 예습하기 – 전투 전 상황

르콕 2019. 7. 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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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해지게 된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사실 무장단체들의 국내진공시도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가 종료되는 시점과 1919년 9월~10월 간 열릴 국제연맹회의 개최 시점이었죠.

 

그러나 당시 무장단체들은 군사력이 형편없어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즉 무기와 탄약, 군수물자공급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감시를 피해 산간벽지에 기지를 건립했기 때문에 식량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괜찮았으나 내실을 다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을 버티고 1920년 봄부터 국내진공을 준비하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당시 국내진공작전은 실행에 옮길 수 없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 간부들이 무력이 아닌 외교로 풀려고 했기 때문이죠.

 

일부 지도부는 홍범도가 봉오동전투를 할 때에도 시기상조라 생각했다는군요.

 

이때 상해임시정부는 친미성향의 이승만이 대통령이었고, 안창호가 사무를 주도했습니다.

 

무장투쟁을 외쳤던 이동휘는 이승만 밑에서 국무총리를 안 하려고 했죠.

 

무장투쟁이 안 먹히니까요. 이동휘는 11월초에야 국무총리로 취임하는데,

 

이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 내에 독립전쟁론이 불붙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국내진공작전에 힘을 쏟죠.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일대에서 독립군을 모집하고 훈련합니다.

 

국내진공작전은 일제의 영향력이 약했던 안도, 무송과 장백 등에서 진입할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일본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관내를 허가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무장단체를 격퇴 후 추격하는 선에 한해 가능했죠.

 

봉오동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북간도지역은 중국이 표면상으로는 단속했으나 속으로는 지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함부로 못했죠.

 

둘째로 북간도에 1914년 광복군정부가 들어서면서 평민출신의 청장년들이 다수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의병장, 양반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었죠.

 

셋째로 북간도지역 독립군은 러시아의 반일단체와 밀접한 연계를 유지했습니다. 무기 공급이 나름 원활했다는 것이죠.

 

홍범도 부대는 전투를 벌이기 직전까지 무기 공급을 받을 수 있었죠.

 

넷째로 이미 봉오동은 독립군의 전초기지였습니다.

 

1908년부터 독립군 연합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최진동이 개척한 곳이었죠.

 

한인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리적으로도 요충지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삼둔자, 서북쪽으로는 북로군정서, 서남쪽으로는 신민단, 북쪽으로는 광복단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배경이야기로 잠깐 흘러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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